살아있는 교회
“살아있는 교회” - John Stott
머리말
교회론이 중요하다.
교회론에 다양한 책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교회가 점점 더 현대 문화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고, 변화에 적응하지 않는다면, 소멸위기에 봉착할 것이라는 의식속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영향이다.
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 |
과학의 냉엄한 객관성속의 이성의 자율성 진리추구(확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진보의 필수부가결성 자기중심적 개인주의 극도의 자기 확신적, 오만과 야심 |
주관적인 경험의 따스함 다원주의와 최고의 가치인 관용(모든이데올로기의동등) 유토피아적 꿈의 거품을 바늘로 찌름 공동체의 일체감 불확실성, 모든 것에 의문을 품을 정도로 겸손 |
일부 특성들은 거부되어야 하지만, 일부는 인정받아 마땅하며 복음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이 둘을 구별할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럼, 포스트모던 문화속의 교회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의 표지는 무엇인가.. 에디깁스와 라이언 볼거(풀러신학대학원 교수)는 조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아홉가지 ‘경향’ 혹은 ‘관행’을 밝혀냈다. 그중 셋은 여섯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핵심’ 관행이었는데, 그 첫째, “예수님의 삶(길)에 동참하는 것” 이고, 두 번째, “세속 공간을 변혁하는 것” 이며, 세 번째는 “공동체로 사는 것” 이다. 즉,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에 동참하는 것이며, 모더니즘에 의해 촉진된 성(聖)-속(俗)의 분리를 거부하는 것이며, 왕국 혹은 가족공동체로서 사는 것이다.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이원론을 거부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모든 교회의 특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많은 교회들은 이러한 핵심 관행을 억제하고 있고, 그래서 이머징 교회들을 통해 새롭게 재발견되고 강조되는 것이다.
문화속에서 다시금 새로운, 참되며 살아있는 교회(living church)가 세워져야 한다.
교회의 본질 :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젼
본격적인 고찰에 앞서 세가지 과정.. 전제가 있어야 한다.
첫째, 우리는 모두 교회에 헌신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일 뿐 아니라 교회의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도 헌신한다. 교회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교회는 역사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다. 영원한 과거에 품으셨고, 역사 속에서 실행하시며,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깨긋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교회에 헌신해야 한다. 실제로, 제도교회의 어떤 측면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며, 심지어 환멸을 느낄지라도..
둘째, 우리는 모두 교회의 선교에 헌신한다. 교회는 이중적이 정체성이 있다. 세상속에서 부름받았고, 한편으로는 증거하고, 섬기도록 다시 보내진다. 그리스도의 선교가 그러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성육신이 선교였다. 천국이 아닌 세상속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나, 그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면서도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 자신이 우리 세계로 들어오셨던 것처럼, 우리를 불러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셋째, 우리는 모두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헌신한다. 교회는 성장하고 있다. 그 성장이 제자도에 대한 피상성으로 인해 깊이보다는 규모의 성장이긴 하지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교회는 성장하고 있지 않다. 교회는 다시 말씀과 성령으로 계속해서 개혁되고 갱신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속에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젼, 살아있는 교회의 두드러진 표지를 찾아본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초대교회를 보아야 한다.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했던 예루살렘 교회..
- 배우는 교회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는 교회이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42절). 오순절의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했으나, 신비함에 멈추지 않고,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지속적으로 모였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이 말은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는 진리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령을 받고, 성령만을 유일한 교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교사로 인정하며, 배우는데 힘썼다.
물론, 사도는 제한적인 존재였고,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사도들의 가르침은 유효하다. ‘사도적 계승’의 의미로, 사도적 교리의 지속성안에서 말씀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의 목사들은 강단에서 성경을 강설하고, 살아있는 교회의 부모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가르치고, 살아있는 교회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서 성장하기 위해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 말씀에 충성하는 것은 참되면서도 살아있는 교회의 첫 표지다.
- 돌보는 교회
두 번째 표지는 교제이다. “그들이... 교제.. 하기를 힘쓰니라” 교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적인 삶으로서 함께 공유하는 것(share in)과 함께 나누는 것(share out)을 다 말한다. 특별히, 함께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행 2:44-45)”
cf) 물건의 통용, 재산공동체
모두를 이러한 부르심으로 부르시진 않으셨다. 성전에서, 집에서 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사랑해야 한다. 성령의 첫 열매가 그러하며, 초대교인들은 사랑했다.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보살폈고, 자신의 재산을 그들과 공유했다. 이러한 자발적인 기독교적 나눔의 원리는 분명히 영속적인 것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교회는 돌보는 교회이다
- 예배하는 교회
세 번째 특성은 예배다. “떡을 떼며”(식사와 함께 성찬, 만찬과 관련..)는 예배를 말한다. 공식적, 비공적인 예배.. 초대교회는 교회에서의 공적인 예배와 함께 비공적인 가정에서의 예배가 있었다. 기쁨이 있는 예배였다. 살아있는 이러한 예배하는 교회이다.
- 전도하는 교회
초대교회는 선교에 헌신했다. 배우고, 교제하고, 예배하는 내적생활의 측면 뿐 아니라, 선교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주님께서 하시되, 구원받게 하시고, 그러한 자들을 교회안에서 더하게 하시고, 날마다 일어나게 하심으로,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하는, 전도되는 교회임을 보여주셨다. 전도하고, 준비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의 네가지 본질적인 표지를 다시 살펴보면, 모두 신자들의 관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사도들과 관계 맺고 있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했다. 둘째, 그들은 서로서로 관계 맺고 있었다. 서로 사랑했고, 살아있는 교회는 돌봄과 나눔의 교회이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었다. 그들은 떡을 떼고 기도하면서 기쁨과 경건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넷째, 그들은 바깥 세상과 관계맺고 있었다. 그들은 증거하며 밖으로 나아갔다.
2. 예배 :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함
예배는 교회의 우선적인 의무이다.
예배 vs 전도 | |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적/공적 예배자
영원토록 계속된다 |
이웃에 대한 의무 전도자가 아니다 (기회있을때마다 전해야 하나, 은사의 영역이다) 영원한 왕국에서는 그치게 된다 |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이며 우리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시편 105:3을 빌리면 “그(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는 것이다.
- 성경적 예배
첫째, 진정한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 즉 성경의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바울의 말처럼, 우상숭배에 전할 수 밖에 없는, 알지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배는 ‘계시에 대한 반응’이라 정의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적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선포하는 것은 예배의 필요불가결한 측면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보다 훨씬 더 특권이 있는 사람이 바로 말씀을 설교하도록 위임받은 사람이다.
- 회중 예배
둘째, 진정한 예배는 회중예배다. 분명 사적이고, 개인적인 예배의 위치도 있다. 그러나 시편기자들은 공동예배에 더 초점을 맞춘다. “새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더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그분의 백성이 모여 함께 드리는 예배다. 이를 위해 종교개혁자들은 로마카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 영적 예배
셋째, 진정한 예배는 영적 예배다. 성경은 진정한 예배란 본질적으로 형식과 예전,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예배는 실재없는 의식이고, 능력없는 형식이고, 두려움 없는 재미이고, 하나님 없는 종교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단순한 영적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뉴에이지 운동에 기초한 어떤 초월성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예배가 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읽고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이 그분의 백성에게 다시금 전해져 들리게 해야 하고, 성찬 혹은 주의 만찬을 두려움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행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실제현존의 의미를 경험해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야곱과 함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신실하게 찬양과 기도를 드려야 한다.
- 도덕적 예배
참된 예배는 도덕적 예배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할 뿐 아니라 올바른 삶을 수반해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들의 희생제사를 받지않으심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종교와 악행과 불의가 뒤섞여 있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성결이 없는 예배는 증오하신다. 바울의 고백처럼,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영적 예배이다.
3. 전도 : 지역교회를 통한 선교성공회 대주교들이 권한 정의에 따르면, 전도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말과 행위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림으로써,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며, 교회의 교제 속에서 그분을 주로 순종하며 섬기게 하는 것”이다.
개인전도와 대중전도(복음 전도자가 군중에게 선포하는 것)의 형태가 있으나, 지역교회의 전도가 오늘날 가장 보편적이고 자연스럽고 생산적인 복음 전파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지역교회의 전도
이것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첫째는, 성경적 이유때문인데, 베드로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는(이것이 예배다) “왕같은 제사장”이자 하나님 찬양을 널리 전파하는(이것이 증거다) “거룩한 나라” 로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기독교 회중을 부르셔서 예배하고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증거로, 증거는 예배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순환해야 한다.
이유 둘째는 전략적인 이유 때문이다. 지역교회는 특정한 이웃 가운데 있다. 따라서, 교회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지역교회는 전도해야 하는데, 먼저 네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지역교회는 교회 자신을 이해하고(교회의 신학), 교회를 조직화하고(교회의 구조), 교회를 표현하고(교회의 메시지), 교회 자신이 되어야(교회의 삶) 한다.
- 교회는 그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의 신학
많은 교회들이 병들어 있는 것은 그들이 그릇된 자아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교회의 정체성)도 무슨일로 부름받았는지(교회의 소명)도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한 자아상을 갖는 것이 개인에게 진리라면 교회에도 진리이다.
오늘날 최소한 그릇된 교회의 상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종교 클럽(내향적인 기독교)이고, 또 하나는 세속적인 선교(종교없는 기독교)이다.
이에 반해 교회를 이해하는 세 번째 방식이 있는데, 이 두가지 그릇된 상 속에 있는 진리를 결합함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을 섬기는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이중 정체성(혹은 성육신적 기독교)이다.
‘이중 정체성’이란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세상에서 부름받았을 뿐 아니라 증거하고 섬기도록 세상으로 다시 보냄받은 한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둘은 실제 교회의 표지이다. 거룩함의 예배와 세상으로 보냄받은 사도성의 선교이다. 알렉 비들러 박사는 교회의 ‘거룩한 세속성’이라는 표현으로 교회의 이중 정체성을 탁월하게 언급했다. 그리고, 실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거룩한 세속성’의 실제적 의미이기도 하다. 바로 그분의 성육신이다. 인간을 몸을 입으셔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섞이시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으신.. 그분은 ‘거룩한 세속성’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자신이 세상속으로 보냄받으신 것처럼, 우리를 세상속으로 보내시는 것이다.
바로 교회가 이러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 교회는 그 자신을 조직화해야 한다: 교회의 구조
교회는 교회의 자기 이해를 나타낼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조직화해야 한다. 교회의 구조에 ‘이중 정체성’을 반영해야 한다.
- 남을 위한 교회, 선교적 교회로 전향해야 한다.
cf) 일반적인 거룩성 중심의 교회는 세속성을 부각시켜야 한다.
‘일요일에만 모이고 주중에는 전혀 만나지 말라..’?
- 5,10년마다 평가하고, 교회의 구조가 정체성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 하는 지 조사하라..
ex) 교회건물
교회의 예배의식 – 비크리스챤을 향한
교회구성원 – 교회활동의 참여도
교회 프로그램 – 사회를 향한..
- 교회는 그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분명한 복음(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실천에 있어서 ‘절대 부동성’과 ‘절대유동성’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고대의 말씀과 형대 세계 사이, 이미 주어진 것과 열린 상태로 남겨진 것 사이, 내용과 상황 사이, 성경과 문화 사이, 계시와 상황화 사이의 변증법을 두고 씨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대한 충성과 사람에 대한 민감성이 더 필요하다. 둘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 다 필요하다.
- 교회는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삶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로서, 복음의 살아 있는 구현이고, 하나님 나라의 표지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 있을 때 인간공동체가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듣고, 보고 경험되어야 한다.
그 대표적 실제는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본질적인 존재에서 사랑이시고,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신 자신의 아들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듯이, 이제 그분의 사랑의 공동체가 되라 부르신 우리가 곧 교회여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은 바로 우리 사랑의 질을 통해서다.
4. 사역: 열둘과 일곱
교회를 향한 사탄의 전략은 항상 동일하다. 사도행전의 기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노골적인 전술로 신체적 폭력 혹은 박해다. 두 번째는 더욱 음흉한 전술로 도덕적 타협이다. 그리고 세 번째, 가장 음흉한 전술로 사회적인 일로 산만하게 하는 것이다. 사역의 중요성은 이중 세 번째에 연관되어 있다.
- 모든 교인의 사역
사도행전 6장의 구제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문제의 발단이 되는 사회사역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함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그런중에도 사도들이 사회사역을 어떤 식으로든 목회사역보다 열등하거나 사도들의 존엄성 아래에 있는 일로 여겼다는 암시는 없다. 전적인 소명의 문제였다.
이 해법은 교회가 다시 배워야할 원리이다. ‘모든 사람 각자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람 각자가 모든 일을 다 하도록 부름받지는 않는다. 이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을 사역으로 부르신다.
- 하나님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역으로 부르신다.
- 하나님은 말씀 사역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사회 적 관리 업무로 산만해지지 않고, 그들의 소명에 집중하기를 기 대하신다.
열둘의 일과 일곱의 일을 모두 ‘디아코니아’(diakonia, 사역)로 일컫는 것은 분명히 의도적이다. 일곱이 식탁의 디아코니아(2절) 혹은 사회사역으로 부름받았다면, 열둘은 말씀의 디아코니아(4절) 혹은 목회사역으로 부름받았다. 어떤 사역도 다른 사역보다 열등하지 않다. 오히려 그 둘은 모두 기독교 사역(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이다. 둘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필요하고, 둘다 전임사역이 될 수 있다. 다른점이 있다면, 그저 다르다는 것뿐이다. 말씀사역이 목회사역이라면, 식탁 사역은 사회사역이다.
요약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역(디아코니아)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은사와 소명과 사역은 그 폭이 넓으므로, 우리는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은사를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
- 목회사역
첫째, 기독교적 감독은 목양적 감독이다. 목자의 일은 양무리를 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목사들은 본질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으로 부름받는다. 즉, 말씀사역이다. 그러나, 목자는 양무리에게 직접 먹이지 않는다. 양들이 스스로 먹을 수 있는 좋은 초장으로 자신의 양무리를 인도한다.
둘째, 기독교적 감독은 복수감독이다. 지역교회의 리더쉽에서 목회팀의 개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목회팀은 전임목사와 협동 목사, 급여를 받는 사람과 자원 봉사자, 안수받은 사람과 평신도, 젊은이와 나이든 사람으로 구성할 수 있다.
cf) 여성의 사역.. 동등성과 상보성..? - ‘머리됨’이 권위보다는 책임을 의미하고, 바울이 금한 것은 직임이라보다는 태도(교만)라는 점, 여성의 행위와 사역에서 부적절하게 여겨지는 것은 문화에 따라 다양하다는 점, 팀사역이 규범이어야 하고 그러한 팀 사역안에서 여성을 포함하여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특수한 은사로 공동선에 기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삼위일체적 교회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성부 하나님께 속한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를 지불하고 사신 것이다. 셋째, 교회위에 감독자를 임명하신 분은 성령이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훌륭한 삼위일체의 진리다. 즉, 교회는 성부 하나님에게 속하고,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었고, 교회에는 성령 하나님이 임명하신 감독들이 있다.
이러한 교회를 섬길 수 있음은 가히 최고의 복이라 할 수 있다..
5. 교제: 코이노니아의 의미
교제(fellowship)란 단어는 소멸했거나 소멸해 가는 경향이 있다.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면서도 과소평가되는 말이다.
- 참 교제의 위상
성경적 논거 : 혼자 있어 외로운 것은 일상의 삶이든, 그리스도인으 삶이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회중, 집단에서 벗어나, 소모임안에서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cf) 소모임안에서의 교제의 유익 – 인격적관계 와 도전
가정의 역할 – 성인으로 자라는 발달과정을 지배한다.
고독한 기독교
역사적 논거 : 유명한 성령운동들은 이러한 교제의 친말함이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공부모임. 감리교의 옥스퍼드의 신성클럽(Holy Club)이나 속회. 스코틀랜드의 기도모임. 동아프리카 부흥때의 교제 모임.
목양적 논거 : 규모가 커지면, 목사의 실제적 목양이 어려워진다. 회중에 대한 목양적 감독은 안수받은 사역에만 속하지 않는다.
cf) ‘에피스코페’(episcope, 감독직) : 회중의 모든 구원성원들에게 맡겨진 역할로 쓰일 수 있다.
‘에피스코포운테스’(episkopountes) 히 12:15 :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즉, 교제모임속에서, 목사는 몇몇 감독직 혹은 목양적 감독직을 평신도 지도자에게 위임하고, 각각돌보게 하심으로, 위 말씀을 실천케 할 수 있다.
- ‘코이노니아’(koinonia)의 의미 : 코이노니아의 핵심에는 ‘공동의’(common)라는 뜻의 형용사 ‘코이노스’(koinos)가 있다. ‘코이노노스’(koinonos)는 ‘동반자’(partner), 동사 ‘코이노네오’(koinoneo)는 ‘나누다’(share)는 뜻이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공유하는 세가지를 보여준다.
- 공동유산 :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
일반적으로 교제는 주관적인 느낌의 함께함의 따스함과 안전감을 말하나, 성경의 용법은 전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닌, 함께 공유하는 것을 나타내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 공유는 삼위일체적 교제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공유하는 것이다. 서로 다르나, 기질과 은사가 다르나 여전히 공유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며, 이 유산에 공동참여하는 것이 교제다. ex) 성찬
- 공동봉사 : 함께 받은 것 뿐 아니라 함께 내어놓는 것, 공동봉사를 말한다. 비록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자발적인 가난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우리는 분명 서로 사랑하며 가난에 처한 형제자매들을 돌보아야 한다. 코이노니아는 물질적 부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 즉 복음에 대한 지식 또한 나누도록 도전한다.
- 상호책임 : 서로서로 나눔에 있어서 서로마주함을 말한다. 주고받는 일에 있어 협력의 관계를 말한다. ( ex) 빌 1:5; 4:15 바울은 그들과 복음을 공유했고, 그들은 그와 선물을 공유했다.)
cf) 소극적인 사랑 : 서로 사랑하면, 서로에 대해 판단하거나악하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물어뜯거나 삼키지 않을 것이다. 성나게 하거나, 시기하거나,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인 사랑 : 서로 사랑하면, 서로에게 친절하고 동정적이고, 서로 참고 용서하고, 서로 복종하고, 서로 세우고, 서로 인색하지 않게 환대를 실천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훈계하고 위로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짐을 질 것이다.
- 교제모임의 실례 :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를 먹을 때, 교제모임은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을 나타낸다. 교제 모임은 우리가 함께 나누어 주는 것을 나타낸다. 교제모임은 외부로 나아가 봉사할 기회를 찾도록 권면받는다. 그리고 또한 서로나눈다. 교제모임에서 구성원들은 자신의 기쁨과 슬픔, 의심과 두려움을 나눌 기회를 얻는다. 이런 식으로 교제모임의 지도자들은 작은 목사가 되고, 회중에 대한 목양적인 감독은 분권화되고 공유된다.
6. 설교: 다섯 가지 역설
교회의 생명은 설교에 달려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신명기의 말씀처럼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면(마 4:4), 교회도 말씀으로 살고, 자라고, 번성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교회는 쇠약해지고 사라진다.
- 진정한 기독교 설교는 성경적이고 동시대적이다(성경과 현실)
- 권위적인 동시에 잠정적이다(교리와 불가지론)
- 예언적이고 목양적이다(단호함과 부드러움)
- 은사인 동시에 공부해야 한다
- 깊이 사고하는 동시에 열정적이다(불붙은논리)
7. 연보: 열가지 원리
- 기독교적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다.
- 카리스마, 즉 성령의 한 은사일 수 있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고무된다.
- 비례적인 연보이다.
- 균등에 기여한다.
- 면밀하게 감독되어야 한다.
- 약간의 우호적인 경쟁에 의해 촉진될 수 있다.
- 추수와 닮았다.
-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그리스 교회들의 경우 그들의 연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는” 것을 상징적으 로 보여주었다(고후 9:13).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유대인 그 리스도인들에게로의 연보는 그리스도의 몸안에 있는 유대인-이방 인 연대에 대한 계획적이고 자의식적인 상징이었다(유대인과 이방 인이 동일한 조건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그리 스도안에서 그들이 함께 상속자요, 함께 지체요, 함께 참여하는 자 가 된다는...).
-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증진한다.
8. 영향력: 소금과 빛
**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4강...과 비교참조...^^